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2세 (문단 편집) == [[필리프 2세]]를 향한 호의 == 헨리 2세의 부친이었던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는 [[엘레오노르 다키텐|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프랑스 왕 [[루이 7세]]와의 결혼 생활에서 낳았던 장녀 마리를 헨리와 결혼시켜 프랑스 왕으로 옹립하려 했었지만 루이 7세가 이를 거절했다. 이후 헨리 2세는 루이 7세와 이혼한 엘레오노르와 결혼해서 여러 자식을 얻었고, 그중의 차남인 [[청년왕 헨리]]를 (여전히 아들이 없던) 루이 7세와 카스티야 공주 콩스탕스 사이의 장녀 마르가리트와 결혼시켜 다시금 프랑스 왕위 획득에 도전하였다. 비록 여성의 영지 상속을 금하는《[[살리카법]]》이 상황에 따라 프랑스 왕국에 잔존하고 있었으나, 잉글랜드의 여군주 [[마틸다(잉글랜드)|마틸다]]의 장남으로서 헨리 2세는 [[앙주 가문|앙주 제국]]의 힘으로《살리카법》정도는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끝내 수포로 돌아갔으니, 루이 7세가 샹파뉴의 '''썩은 [[백합]]'''[* 그 용모는 [[성모 마리아]]의 상징인 백합처럼 대단히 아름다웠으나, 그 행실은 자신의 미모만 믿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오만하였기에 붙은 별명이라고 한다.] 아델과의 사이에서 기어이 아들 [[필리프 2세]]를 얻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가장 유명한 사건이 있었는데 "파리 전체가 불바다에 휩쓸린 것처럼 보였고, 파리 신민들은 온 성당의 종을 울리며 거리로 뛰어나와 횃불을 켜고, 주먹을 휘두르며 ''''이 아이가 [[존 왕|잉글랜드 국왕]]의 망치가 될 것''''이라고 소리쳤다." 헨리 2세도 사악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필리프 2세의 생년월인 1165년 8월([[아우구스투스]])에 2개의 [[혜성]]이 잉글랜드 서부와 북부 지역에서 각각 관측되었고, 잉글랜드의 왕실 점술가들이 일제히 예언하길 '''헨리 2세의 파멸'''과 '''앙주 제국의 패망'''을 뜻하는 것이었다. 보통 알려진 것과 반대로 필리프 2세의 치세 초반부터 1188년 초까지 헨리 2세는 그의 오만방자한 언행을 참아 주고 각별히 보호했다고 여겨지며, 그런 헨리 2세의 이 ‘새로운 태도’는 [[노망]]이 의심스럽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수준으로 당시 대륙과 잉글랜드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필리프 2세를 데리고 다니며 봉신들 앞에서 연장자의 능숙함을 보여주었고, 심지어 평생 터득한 지혜와 정치적 비책들을 전수 해 주었으며, 소년은 이 연장자의 가르침에 '''자신을 온전히 복종시켰다.''' [[웨일스]]의 제럴드는 헨리 2세가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의 이혼 이전부터 상위 주군의 아내를 빼앗을 속셈을 품었다고 비난하면서도 필리프 2세가 [[플랑드르]]를 중추로 한 북프랑스 반란을 종식할 수 있었던 이유는 헨리 2세의 지속적인 원조와 보호가 상당한 것이었음을 짤막하게 인정했다. 차남 [[청년왕 헨리]]가 인생의 낙이었던 [[마상창시합]]을 제쳐두고 필리프 2세의 보호에 열중했을 때 잠시 떼어놓기도 했지만 반란에 관한 의심 탓이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들이 재반란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허구한 날 들락날락한 곳이 필리프 2세의 거처였을 뿐만 아니라 정황도 다분했음에도 헨리 2세의 보복의 칼날은 필리프 2세에게 향하지 않았다. 프랑스 신부에 의하면 헨리 2세가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같은 해에 필리프 2세의 영지에 사냥터 마련을 돕겠다는 명목으로 선물 공세를 아낌없이 퍼부었다고 한다.[* [[앙주 가문|앙주 제국]] 곳곳을 휘젓고 다니며 온갖 짐승들을 사로잡게 하고 짐승들을 위한 전용 우리와 먹이까지 넘치도록 주었다고 한다.] 두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던 4남 [[조프루아 2세|제프리 2세]]가 3남 리처드를 제치고 필리프 2세와 끈끈한 동맹을 맺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판국에도 병에 시달리게 되자 필리프 2세를 자신의 거처에 며칠 묵게 하고는 위로를 받고자 하여 그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필리프 2세가 헨리 2세와 아들들 사이를 이간한 것을 논할 때 필리프 2세와 헨리의 아들들 중심으로 서술하고 그 결과의 양상이 필리프의 공적으로 주로 흡수되는 경향에 따라 헨리 2세가 베풀었던 이유 모를 수수께끼 같은 행적은 상대적으로 적잖이 논외가 되곤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